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독소 불가침조약 (문단 편집) == 소련의 정책 변화와 독일의 접근 == 스탈린은 협상 내내 상당히 유연한 자세를 보였음에도 불구하고 영국과 프랑스의 협상 태도를 보고 나서 이들이 소련과의 안보 체제를 강화하여 함께 독일에 맞설 생각이 없다고 판단했다. 스탈린은 양국이 독일과 소련을 싸우게 하고 뒤로 빠지지 않을까 하는 의심에 더 집중하기 시작했다. 이 의심은 상당히 그럴 듯 했으며, 영국과 프랑스의 정치인들 중에도 정말 그런 [[이이제이]]를 바란 사람들이 많았다. 이런 영국과 프랑스의 분위기는 즉각 소련의 대외 첩보망에 감지되어 스탈린에게 보고되었고, 스탈린은 자신의 의심을 확신으로 굳혔다. 뮌헨 협정을 휴짓조각으로 만든 체코 병합, 폴란드에 대한 침공 준비 등이 시작되고 5월경부터 영프는 소련이든 뭐든 독일을 막으려면 누구와도 손잡아야 한다는 것을 뒤늦게 깨달았다. 하지만 [[데이비드 로이드 조지]], [[윈스턴 처칠]] 등 거물들의 강한 제안이 있었음에도 소련에 대한 뿌리깊은 불신 때문에 협정 체결은 지지부진했다. 이런 꼴을 수년간 질리도록 봐온 스탈린의 마음을 흔든 것은 다름 아닌 '''[[아돌프 히틀러]]'''였다. 독일 또한 지난 [[제1차 세계 대전]]에서 전선을 마구 넓혀서 패배한 이후 [[양면전쟁]]의 위험성을 뼈저리게 깨달았으며[* 사실 이 점은 프로이센 시대부터 강조되었었다. 군사적 천재였던 [[프리드리히 대왕]]조차도 [[7년 전쟁]] 당시 동서남북으로 적국을 두고 전쟁을 벌여서 멸망할 뻔했다. 후일 "[[브란덴부르크 가의 기적]]"이라고 부르는, 말 그대로 기적이 일어났던 덕분에 승리할 수 있었다.], 아울러 소련과 서방 세계가 접촉하는 것도 눈치채고 있었다. 영국과 프랑스가 실제 참전할 것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았으나, 침략 전쟁에 소련이 개입할 것을 우려하고 있었으며, 만약에 대비하며 동부에서의 세력 균형을 위해 소련을 묶어둘 필요성이 있었다. 계획의 스타트를 끊게 될 [[폴란드 침공]]에 소련이 폴란드 편으로 개입하면 초장부터 만사를 그르칠 수 있으므로[* 그 당시 히틀러는 폴란드와 전쟁을 벌이기로 이미 결정해 놓고 있었는데, [[폴란드군]] 자체는 몰라도 소련이 폴란드를 돕는다면 전쟁을 첫판부터 완전히 그르칠 여지가 있었다.] 히틀러는 소련을 어떻게 묶어둘 것인지 고심하고 있었다. 그 때까지만 해도 히틀러는 영불이 폴란드를 구하러 전쟁을 일으킬 수는 없을 것으로 생각했고,[* 실제 히틀러의 생각대로 양국은 자국 젊은이를 희생하며 폴란드를 도울 생각이 없었다. 영국과 프랑스는 [[폴란드 침공]]으로 대독 선전포고는 했으나, 어떠한 군사 작전도 벌이지 않은 채 본진에서 방어전이나 준비했다. 이러한 영불 양국의 행태를 소위 [[가짜 전쟁]]이라고 부른다.] 대신 그 뒤에 있는 소련의 개입은 우려했다. 8월 2일, 독일 외무장관 [[요아힘 폰 리벤트로프]]는 이런 걱정을 하는 히틀러에게 스탈린과 협상하도록 권했고, 히틀러는 리벤트로프의 제안을 받아들여 소련에게 ''''발트해에서 [[흑해]]까지의 지역의 결산' '''[* '스탈린과 히틀러의 전쟁'에서는 이를 '''유럽에서 옛 차르 제국을 재건할 가능성'''이라고 표현했으며, 스탈린은 리벤트로프를 만날 때 '''[[http://gdb.rferl.org/4001076F-528B-4625-9F85-B1C4E52C8547_mw1024_s_n.jpg|어린애같이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고 기록했다.]을 제안했다. 소련으로서는 구미가 매우 당기는 일이었고, 믿음직스럽지 못한 서방놈들과 함께 자기들 도움은 죽어도 싫다는 폴란드를 돕느니, 세력권을 나눠서 서로 맛있게 잘 먹고 사이좋게 지내자는 독일의 제안이 훨씬 달콤했다. 또한 냉정한 현실주의자였던 스탈린은 히틀러가 미치지 않고서야 서방 특히 대영제국을 뒤에 두고 소련을 적대할 수는 없을 것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헨리 키신저]]의 말에 따르면 불행히도 히틀러는 자신이 언제나 옳다고 생각하는 이성적 판단과는 거리가 먼 바보였고 실제 영국을 배후에 놔둔 채 독소전을 일으켰다. 반면 스탈린은 강철 인간이라는 별명답게 굉장히 기계적이고 냉정한 외교를 지향했으나 이것이 대표적 단점이기도 했다. 스탈린은 너무 기계적인 나머지 타국의 결정에 감정적인 판단이 들어가는 것을 고려하지 못하고 장기적 판을 말아먹는 일이 많았다. 그리고 이후 냉전기의 동유럽 분할 때도 비슷한 실수를 하고 만다. -[[헨리 키신저]]의 diplomacy 인용- ] 8월 17일 소련은 독일과의 회담에 동의했고, 8월 19일 양국은 [[https://en.wikipedia.org/wiki/German%E2%80%93Soviet_Credit_Agreement_(1939)|독소 신용 협정(German-Soviet Credit Agreement)]]를 체결하였다. 경제 협정 체결 후 하루 뒤인 8월 20일, 히틀러는 스탈린에게 다음과 같은 전보를 보냈다. >'''스탈린 서기장 귀하''' > >1939년 8월 20일 > >1. 본인은 독일과 소련의 관계 개선을 위한 디딤돌인 새로운 독소 무역 협정의 서명을 진심으로 환영합니다. >2. 소련과의 불가침조약의 체결은 장기적인 독일 정책임을 의미합니다. >3. 귀측의 외무장관 [[뱌체슬라프 몰로토프|몰로토프]]가 전달한 불가침조약을 수락하지만 이와 관련된 몇 가지 문제점들을 가장 신속히 설명하고자 합니다. >4. 독일과 폴란드 간의 갈등은 더 이상 지탱할 수 없습니다. 폴란드의 대국에 대한 무례한 행위는 언제라도 위기를 초래할 수 있습니다. >5. 양국이 함께 새로운 관계를 구축할 의도가 있다면 빨리 서둘러야 합니다. 그러므로 본인은 귀하가 [[요아힘 폰 리벤트로프|나의 외무장관]]을 8월 22일(화), 혹은 늦어도 8월 23일(수)에 맞이할 것을 제안하는 바입니다. > >귀하의 즉각적인 회신을 요망합니다. > >'''[[아돌프 히틀러]]''' 스탈린은 이 전보를 받고 매우 기뻐하며 다음날 답신을 보냈다. >'''히틀러 총통 귀하''' > >1939년 8월 21일 > >귀하의 서한에 감사합니다. 나는 독일과 소련간의 불가침 협정을 계기로 양국 간의 정치적 관계가 개선되었으면 합니다. 양국의 국민들은 평화로운 관계가 필요합니다. 독일 정부가 불가침 조약에 합의키로 한 사실은 정치적 갈등의 제거와 양국 간의 평화와 협력을 구축할 계기가 될 것입니다. 소련 정부는 독일 외상 리벤트로프의 8월 23일 모스크바 방문에 동의하는 것을 귀하께 알립니다. > > '''[[이오시프 스탈린]]''' 히틀러는 전보를 보낸 후 답장을 기다리며 잠도 못 이룰 정도로 긴장했다고 하며 스탈린으로부터 긍정적인 톤의 답장을 받자 미친듯이 기뻐했다고 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